두 번의 촌극은 없었다. 가을야구 사상 첫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일정이 꼬인 2024 KBO 한국시리즈(KS)는 초유의 2박3일 경기에 실질적인 더블헤더로 치러진다.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상황에서 한 팀이 KS에서 하루에 2승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22일 오후 4시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2024 신한 SOL Bank KBO리그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KS·7전4선승제) 1차전 서스펜디드 게임과 오후 6시30분 예정된 2차전이 오후 1시53분 일찌감치 순연 결정이 났다. 하루 미뤄져 23일 두 경기가 차례로 열린다.
KBO가 밝힌 순연 사유는 그라운드 정비 소요 및 비 예보였다. 오후 1시가 넘어 비가 그쳤지만 전날 밤부터 새벽 사이에 워낙 많은 비가 내렸고, 그라운드 곳곳에 물기가 가득했다. 대형 방수포로 내야를 덮었고, 구장 관리 팀에서 방수포 아래에 공기를 주입하며 물기를 제거하고 잔디를 보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1루와 3루 덕아웃 앞과 백네트 파울 지역은 물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라운드 정비 작업에만 최소 3시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예정된 오후 4시 서스펜디드 게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KBO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전날(21일) 어떻게든 경기를 강행했던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장과 임채섭 경기감독관이 그라운드 상태를 직접 살핀 뒤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이날 오후부터 기상청의 비 예보가 또 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경기를 강행했다간 다시 중단되는 촌극을 반복할 수 있었다. 예보대로 오후 4시를 넘어 많은 비가 내렸다.
포스트시즌 사상 첫 우천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면서 KS는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졌다. 21일 시작된 1차전 경기 전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방수포를 3번이나 깔았다 걷기를 반복했고,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6분이나 늦은 오후 7시36분에 경기가 시작됐다.
저녁에도 계속 비 예보가 있어 정상적인 개최가 쉽지 않았지만 KBO는 밀어붙였다. 22일에도 비 예보가 있어 KS 일정이 연이틀 밀리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수가 됐다. 예보대로 경기 내내 비가 내리면서 빗물에 젖은 마운드와 그라운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양 팀 투수들은 스파이크에 박힌 진흙을 털어내느라 진땀을 뺐고, 주자들도 땅이 미끄럽다 보니 스타트를 제대로 걸지 못했다.
그래도 KIA 제임스 네일과 삼성 원태인의 팽팽한 투수전 속에 5회까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됐고, 클리닝 타임 때 구장 관리 요원들이 나와 그라운드 복토 작업도 했지만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헛수고가 됐다.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며 더 이상 경기를 속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경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6회초 삼성 선두타자 김헌곤이 우월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0의 균형을 깼고, 르윈 디아즈와 강민호의 연속 볼넷으로 무사 1,2루 찬스가 연결됐다. KIA 구원 장현식은 무사 1루에서 올라온 뒤 볼넷을 주더니 김영웅 상대로도 초구에 볼을 던지며 제구가 흔들렸다.
삼성이 완전히 흐름을 탔지만 여기서 경기가 멈췄다. 오후 9시24분 우천 중단된 경기는 45분을 기다린 끝에 오후 10시9분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됐다. 동점 상황에서 원정팀이 이닝 초 공격에서 리드하는 득점을 냈을 경우 홈팀이 공격을 시작하지 못했거나 해당 이닝 말 공격 때 동점 또는 역전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중단되면 공격과 수비 횟수 불균형으로 서스펜디드 게임이 성립된다.
결과적으로 삼성이 1-0 리드를 잡으며 기회를 이어갔지만 훨씬 큰 손해를 보게 생겼다. 5회까지 투구수 66개로 무실점 호투하던 선발투수 원태인을 강제로 교체하게 된 것이 크다. 투구수로 보면 원태인은 못해도 7회까지 충분히 투구가 가능했다. 불펜이 약한 삼성 입장에서 컨디션 좋은 원태인을 5이닝에 교체한 것은 엄청난 손해다. 같은 상황에서 재개되지만 경기 분위기나 흐름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21일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된 뒤 공식 인터뷰에서 박진만 삼성 감독은 "시즌 중에도 잘 안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해 당황스럽다. 경기를 시작할 때부터 선발투수를 쓰고 중간에 끊기는 경우를 걱정했다. 원태인이 좋은 투구를 하고 있었는데 아쉽다. 내일 원태인을 쓰긴 어렵다"며 "우리가 흐름을 가져온 상황에서 경기가 끊겼다. 시즌 때도 말했지만 비가 오면 경기를 안 들어가는 게 좋다. 선수들이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좋은 경기력이 나오기 어렵다. 선수 보호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다. 오늘도 경기에 안 들어갔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22일에도 비 덕분에 완전한 휴식을 취하게 된 것이 삼성으로선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하다. 휴식 시간을 하루 벌었다. 박진만 감독은 22일 순연이 결정된 뒤 인터뷰에서 "어제 제 소신을 다 이야기했다. 팀 내 부상 선수들이 많다 보니 민감하게 생각했다. 어제 비로 인해 양 팀 선수들 모두 부상 없이 지나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순연으로 인한) 유불리를 떠나 정상적인 그라운드 상태에서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상대 팀도 마찬가지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크게 개의치 않고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범호 KIA 감독도 "유불리를 떠나 그라운드와 날씨 사정으로 인해 순연된 걸 어쩌겠는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변화된 상황에 맞추면 된다. 코칭스태프와 논의 잘해서 내일 경기 잘 준비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21일 중단된 KS 1차전이 22일 하루 쉬고 23일로 넘어가면서 초유의 2박3일 경기로 치러지게 됐다. 여기에 2차전이 오후 5시30분안에 끝나지 않으면 종료 시점으로부터 1시간 후에 2차전이 열린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차전 남은 4이닝에 이어 2차전 9이닝까지 하루에 최소 13이닝을 치러야 한다. 18이닝은 아니지만 더블헤더에 가까운 경기로 하루에 2경기 결과를 받게 된다. 한 팀이 연승을 하거나 연패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KS 시리즈 전체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다.
삼성 원태인은 22일 순연 뒤 취재진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쪽으로 흐름이 다 넘어온 상태에서 끊겼다. 어떤 결과가 됐을지 모르지만 내가 좋은 피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아쉬웠다. 우리가 승기를 굳힐 수 있는 기회에서 딱 끊겨서 모두가 다 아쉽다고 생각했다. 레이더를 봤을 때 더 이상 경기를 못 할 것 같았지만 이왕 할 거면 끝까지 하거나 아니면 애초에 안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며 "우리가 6회초에 점수를 더 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찬스인 상황이고, 1~2점 더 달아나 1차전을 잡으면 2차전까지 좋은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하루에 2승을 한다면 오히려 우리한테 분위기가 확 넘어올 수 있다. 위기이자 기회라고 생각한다. 선수들도 내일 있을 2경기 다 잡고 대구로 넘어가자는 얘기를 선수들끼리 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