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그러니 이제 모두가 알아버렸다. 손에 피를 묻혀가며 지키려던 비밀이었는데...제 안에 숨겨진 온갖 비겁함을 끄집어내어 지키려던 비밀이었는데...
ENA 월화드라마 ‘유어 아너’ 속 송판호(손현주 분)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담당 형사 장채림(박지연 분)이 알았고 강소영(정은채 분) 검사도 알았다. 김상현(신예찬 분) 교통치사 뺑소니범의 정체가 송판호의 아들 송호영(김도훈 분)임을. 그리고 이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김강헌(김명민 분)조차 알게 됐다.
낯선 환경. 세상 모두로부터 고립된, 아니 세상 모두의 적의에 둘러싸인,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속에서 송판호는 생각한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아냐. 호영이만 살리면 될 일이야!”
딸 아이 김은(박세현 분)은 언제나 안쓰러운 아이였다. 아비의 죄로 뱃속에서부터 많은 위협을 받았다. 그 탓인지 10살 정도에서 지능이 멈췄다. 그럼에도 아이는 언제나 선량하고 따뜻한 온기를 나눠주곤 했다.
얼굴 마주보기를 피하는 은이에게 물었었다. “은이는 아빠가 무섭니?” “아니요. 안무서워요. 아빠 아프잖아요. 아빠는 오빠가 죽어서 마음이 슬픈데 엄마랑 내가 슬퍼할까봐 참고 있잖아요. 아빠 볼 때마다 미안해서 그랬어요.”
제 오빠 상현이 죽고 그럼에도 웃음을 되찾아가던 아이를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웃음의 이유가 하필이면 상현을 죽인 송판호의 아들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송판호에게 경고했다. 송판호는 못만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쓰러졌다. 울음 섞인 간절함을 담아 126개나 되는 음성메시지를 남겼음에도 송판호의 아들 송호영은 단 한 번의 답도 하지 않았다.
딸 아이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 송호영을 만났다. “은이가 지금 많이 아파.” 녀석이 당돌하게 답했다. “은이가 아픈 게 제 탓은 아닐 텐데요.” 녀석이 보인 적의를 무시하고 부탁했다. “부탁을 하나 하지. 은이가 건강해질 때까지 은이 옆에 있어줬으면 해.” 녀석의 적의가 짙어졌다. “아버지가 만나지 말라고 말씀하시던데요. 그거 아저씨가 시키신 거 아닙니까? 거절할 수 없는 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예요. 제가 거절하면 아버지나 저나 무사할 수 없잖아요. 아저씨, 그런 사람이잖아요.”
녀석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제 딴에 큰 용기를 낸 거겠지.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근데 그 소리가 익숙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숨소리. 등골을 써늘하게 만드는 그 소리. 급기야 녀석은 네블라이저까지 꺼내 흡입한다. ‘아, 이제 알겠다. 너였구나!’
아들 호영 입에서 “만약에 김상혁 무죄 내리시면 저 자수할 거예요!”란 말을 들었을 때 송판호는 철렁했다. “니가 왜 재판에 관여해?” 물었을 때 아들이 발작했다. “그 새끼가 엄마를 죽였으니까!”
2년이나 흘렀지만 아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엄마는 우울증이야. 김상혁에겐 혐의가 없어. 증거불충분으로 종결됐어.” 설득해 보지만 “김상혁이 죄가 없다면 엄마는 왜 그랬을까요? 아무도 안믿어주니까! 아무도 안믿어주니까 엄마가 그런 거잖아!”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일부러?’ 하지만 아닐 것이다. 김상현이 그 시간에 그 곳을 지날 것을 호영이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랬는데..
“오늘 니가 만난 그 애, 죽은 김상현 동생이고 김강헌 회장 딸이야.”라 일러줬을 때 아들이 덤덤하게 말한다. “예 알아요.” 안다고? 알면서? “너 혹시 일부러 만난 거니? 아니지? 아닐거야. 그냥 우연히 만난 거지?” 물었을 때 아들은 말없이 다가와 안으면서 말한다. “죄송해요. 안만날게요.”
세상에 맙소사! 김강헌으로부터 달아나자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아들은 일부러 다가가고 있었다고? 아닐 거야. 제발..아니어야 돼.
그러니 김강헌과의 악연은 이미 2년 전에 시작됐다. 언론은 ‘김상혁 폭행 혐의 무죄’로 보도한 그 사건. 김상혁 변호인은 그 사건을 ‘마약 강제투약사건 혐의없음으로 종결’이라 말했다. 판사석의 송판호는 쥐고있던 노란 연필을 힘주어 비틀었다. ‘감히 내 법정에서 내 아내 사건을 왜곡하다니..’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성폭행 사건이었다. 제척사유로 인해 지켜볼 수밖에 없던 판결. 자신이 몸담아왔던 법원은, 김강헌에게 굴복한 동료 판사는, 가해자 김상혁을 무죄방면했다. 그리고 지금도 머리맡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독송해 주고 있는 아내는 자살했다.
당시에도 무력했고 비겁했다. 다시 무력하고 비겁한 채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이번엔 제 손으로 원수 놈을 방면해야 된다. 아들 호영을 위해서. 그런데 과연 이게 맞는 일일까?
아내 사건 때 자신보다 더 안타까워 했던 장채림 형사가 비웃음을 담아 말한다. “김상현 사망사건 뺑소니범. 이상택은 김상현 사망시간에 다른 곳에 있었다는 정황이 있었어요. 그때 판사님은 재판중이셨고요. 이상택이 아니라면, 판사님이 아니라면 용의자는 딱 한 사람으로 좁혀져요. 수사를 다시 시작해야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김상혁, 김강헌을 먼저 잡아야겠죠.” 김상혁을 풀어주면 송호영을 잡아들이겠단 말이다. 장채림이 안다면 당연히 강소영도 알고 있다.
사면초가다. 김상혁을 풀어주면 아들은 자수한다고 한다. 장채림은 아들을 잡아들일 거란다. 풀어주지 않으면 김강헌이 아들과 자신을 죽일 것이다. 불쌍한 외노자 티랍까지 제 손으로 죽여가며 묻으려던 진실은 애꿎은 많은 죽음들만 남긴 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친친 얽혀갈 뿐이다.
김강헌은 송판호에게 말했다. “고작 스무 살에 남들보다 암기 좀 잘한 걸로 가장 좋은 대학을 갔겠지. 남들보다 성실해서 판사가 됐겠고... 고작 그 정도로 스스로를 과대평가 한 건가? 희망을 믿지마! 두려움을 믿어! 그게 자네가 갖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런 김강헌은? 햇살처럼 빛나던 스무 살 아들이 길바닥에서 죽었다. 아픈 손가락 큰아들은 살인자가 되어 수감됐다.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해주던 외동딸의 여린 마음도 무너뜨렸다. 그러니 고작 폭력, 고작 권력, 고작 금력을 쥐고 소중한 무엇을 지켜내고 있기는 한 건가?
장채림은 말했다. “신념을 갖고 열심히 잘 사는 것, 그게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세상과 나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송판호의 고작 성실보다, 김강헌의 고작 권력보다 장채림의 신념은 아직 많은 걸 지켜내고 있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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