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등 프로야구 상위권 팀들은 사용을 꺼리고 있는 ‘신문물’ 피치컴. 그런데 왜 윌리엄 쿠에바스(KT 위즈)는 피치컴을 “투구에 정말 큰 도움이 되는 장비”라며 적극 추천했을까.
쿠에바스는 지난 17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4 신한 SOL뱅크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와의 시즌 9차전에 선발 등판해 6이닝 3피안타 4볼넷 5탈삼진 1실점(비자책) 107구를 기록하며 팀의 9-2 완승을 이끌었다. KT의 최근 4연승, 키움전 8연승, 고척스카이돔 4연승을 이끈 호투였다.
쿠에바스는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새롭게 도입한 피치컴을 착용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전날 'KBO 1호 피치컴 착용자' 웨스 벤자민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본인이 직접 송신기를 누르며 수신기를 착용한 포수 강현우에게 직접 사인을 냈다. 통상적으로 피치컴은 사인을 보내는 주체인 포수가 송신기를 통해 투수에게 구종 및 방향을 지시한다.
KT 이강철 감독은 경기 전 “쿠에바스는 피치컴이 필요 없다. 포수가 송신기를 갖고 있으면 계속 고개를 흔들 것이다. 이제는 정말 자기 맘대로 던질 거 같다”라고 웃으며 “아마 쿠에바스 본인이 송신기를 갖고 있으면 투구 템포가 더 빠를 것”이라고 새로운 관전 포인트를 짚기도 했다.
피치컴 효과였을까. 무패 승률왕답지 않게 여름 내내 잦은 기복에 시달린 쿠에바스는 마침내 이날 반등을 이뤄냈다. 피치컴 송신기를 통해 자기주도적인 투구를 펼쳤고, 포수와 사인 교환 시간을 줄이면서 본인만의 템포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최고 150km의 직구(54개)를 비롯해 체인지업(15개), 투심(17개), 커터(8개), 슬러브(13개) 등 다양한 구종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쿠에바스는 6월 2일 광주 KIA전 이후 45일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쿠에바스는 경기 후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피치컴이 훨씬 더 도움이 됐다. 이전에는 내가 생각하는 구종을 던지기까지 포수와 소통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오늘은 내가 직접 전달을 해서 온전히 내 생각대로 확신을 갖고 투구할 수 있었다.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라고 피치컴 장비를 호평했다.
쿠에바스 또한 벤자민과 마찬가지로 피치컴 유경험자였다. 그는 “미국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도 피치컴을 이용해 투구를 펼쳤다. 트리플A와 메이저리그 피치컴의 차이는 트리플A는 투수, 포수, 불펜만 착용이 가능한 반면 메이저리그는 이들에 더해 모든 내야수들이 이를 착용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KT의 경우 전날 투수가 송신기, 포수, 유격수, 2루수가 수신기를 착용했다.
KBO는 경기 중 투수와 포수 간의 사인 교환을 할 수 있는 장비인 피치컴 세트를 15일 각 구단에 배포하고 구단 담당자를 대상으로 해당 장비의 사용 방법, 규정 등을 안내하는 설명회를 개최했다.
KBO는 피치컴 사용을 위해 지난 1일 전파인증을 완료했으며, 16일부터 KBO리그 및 퓨처스리그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피치컴 세트는 사인을 입력하는 송신기와 이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수신기로 구성돼 있다. 각 세트는 송신기 3개, 수신기 12개로, KBO리그와 퓨처스리그 모든 팀에 각 1세트가 전달됐다.
송신기에는 9개의 버튼이 있어 사전에 설정된 구종과 투구 위치 버튼을 순서대로 입력하면 수신기에 음성으로 전달된다. 송신기는 투수나 포수에 한해 착용 가능하며, 투수의 경우 글러브 또는 보호대를 활용해 팔목에 착용한다. 포수의 경우 팔목, 무릎 등에 보호대를 활용해 희망하는 위치에 착용할 수 있다.
수신기는 모자 안쪽에 착용한다. 투수나 포수 외에도 그라운드 내 최대 3명의 야수가 착용 가능하며 더그아웃 및 불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벤자민은 16일 피치컴과 함께 6⅓이닝 5피안타(1피홈런) 2볼넷 5탈삼진 1실점 호투로 시즌 8승(4패)째를 챙긴 뒤 “피치컴이 빠른 템포를 유지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됐다. 다른 선수들도 곧 많이 활용할 것으로 본다. 미국에서 주자가 2루에 위치해 있으면 사인을 훔치는 게 정말 많았다. 한국에선 그게 얼마나 이뤄지는지 모르겠지만, 주자를 많이 신경 쓰지 않고 타자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내겐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라고 호평했다.
이강철 감독도 “경기 진행 속도가 엄청 빠르더라. 포수가 사인을 엄청 빠르게 낸다”라며 “다들 피치컴을 안 쓴다는 기사를 봤는데 우리 선수들을 보니까 잘만 적응하더라. 내야수들도 구종에 따라서 수비를 할 수 있으니 좋을 거 같다. 선수한테 정확히 잘 들리냐고 했더니 너무 소리가 커서 상대에 들릴까봐 걱정된다고 하더라. 피치클락은 잘 모르겠는데 피치컴은 괜찮은 거 같다”라고 후기를 남겼다.
다만 리그의 모든 구성원들이 피치컴을 반기는 건 아니다. 선두를 질주 중인 KIA 이범호 감독은 “젊은 선수들이라 장비 숙지는 금방 할 거 같지만 버튼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외우고, 수신기를 어떻게 모자에 넣고 들을 지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을 안 하면 도저히 사용할 수 없다. 완벽하게 숙지하기 전까지 사용은 어려울 것 같다”라고 밝혔고, 2위 삼성 박진만 감독도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버튼에 집중하다가 사인 미스가 날 수도 있다”라고 우려의 시선을 보였다.
4위 두산 이승엽 감독도 “의무 사용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매 경기 공 하나에 승부가 직결되는데 시즌 마치고 준비 과정이 필요할 거 같다. 물론 경기 시간을 줄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당장 사용은 힘들다”라고 같은 의견을 냈다.
쿠에바스는 아직 신문물이 낯선 KBO리그 구성원들을 향해 “피치컴은 투수가 템포를 빨리 가져갈 수 있어 큰 도움이 되는 장비라고 생각한다”라며 “버튼을 누르고 나서 포수가 듣기까지 1~2초 정도 시간이 걸린다. 한국 선수들이 만일 장비를 쓸 거면 포수에게 공을 받고 마운드에 오르기 전에 사인을 내면 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 본다”라고 피치컴 ‘꿀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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