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타격 슬럼프에도 감독의 무한 배려 아래 4번타자 자리를 굳건히 지켰던 작년 가을야구를 잊은 것일까. 박병호(38·KT 위즈)는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었길래 구단에 방출을 요청하는 사태에 이르렀을까.
프로야구 KT 위즈의 베테랑 중심타자 박병호는 지난 주말 구단에 돌연 팀을 떠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25일 수원 키움 히어로즈전 4-2로 앞선 8회말 1사 2루 찬스에서 조용호의 대타로 등장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는데 경기 종료 후 웨이버 공시를 요청했다. 적은 출전 시간과 좁아진 입지로 고민과 면담을 거듭하던 그가 KT 유니폼을 벗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때 ‘국민거포’로 불린 박병호는 한국프로야구 홈런 부문의 살아있는 역사다. 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 1차 지명을 받은 뒤 지난해까지 19시즌 동안 무려 380홈런을 쏘아 올렸고, 에이징 커브가 의심되던 2022년 KT와 3년 30억 원 FA 계약 후 35홈런을 치며 통산 6번째(2012, 2013, 2014, 2015, 2019, 2022)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박병호는 36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가공할만한 파워를 과시, 래리 서튼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의 2005년 최고령(만 35세) 홈런왕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리고 ‘통산 홈런 1위’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5회)을 넘어 역대 최다인 홈런왕 6회 수상의 새 역사를 썼다. 그 때까지만 해도 KT의 박병호와의 계약은 ‘신의 한 수’로 여겨졌다.
박병호는 FA 계약의 두 번째 해를 맞아 국민거포의 자존심을 제대로 구겼다. 2022년과 비교해 타율은 2할7푼5리에서 2할8푼3리로 상승했지만 홈런(35개→28개), 타점(98개→87개), 장타율(.559→.443)이 급감했고, 포스트시즌에 돌입해 타율 1할5푼8리(38타수 6안타)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박병호는 NC 다이노스와의 플레이오프 5경기 모두 4번타자를 맡아 20타수 4안타 1타점 타율 2할로 흐름을 제대로 끊었다. 20타석에 들어선 가운데 삼진 7개에 병살타 2개를 기록했고, 적시타는 4차전이 유일했다.
LG 트윈스를 만난 한국시리즈 또한 큰 반전은 없었다. 이강철 감독의 무한 신뢰 속 타순 변동 없이 그대로 4번타자를 맡았지만 1차전 4타수 무안타, 2차전 4타수 무안타로 침묵했다. 3차전 홈런 포함 멀티히트로 잠시 제 몫을 해냈지만, 4차전 2타수 무안타, 5차전 3타수 무안타 부진 속 친정 LG가 우승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박병호는 시즌이 끝난 뒤 “(가을야구가) 마음에 많이 남는다. 보여준 것도 없이 허무함만 남았다. 내 활약이 있었으면 결과가 바뀌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아쉬운 한국시리즈를 보냈다. 다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라고 자책하며 “반성을 해야 하는 겨울이다. 내년에는 잘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목표를 갖고 겨울을 보낼 것”이라고 실패를 인정한 뒤 절치부심을 외쳤다.
하지만 박병호는 FA 계약 마지막 해를 맞아 더 큰 시련에 직면했다. 2024시즌 개막과 함께 다시 4번 선발 중책을 담당했지만 3월 한 달간 홈런 없이 타율 1할5푼4리 3타점의 방황을 거듭했다. 스트레스가 극심했는지 3월 28일 수원 두산전에서는 끝내기를 친 뒤 이른바 ‘무성의 인터뷰’로 취재진에 괜한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이강철 감독은 박병호를 살리기 위해 타순도 바꿔보고, 교체 출전도 시켜봤지만 부진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박병호는 4월 월간 타율 2할2푼9리, 5월 2할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사이 문상철이 1루수, 강백호가 지명타자로 출전해 시너지효과를 내며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박병호는 44경기 타율 1할9푼8리 3홈런 10타점 장타율 .307 출루율 .331의 슬럼프와 함께 벤치 멤버로 전락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박병호의 부진에서 출발한다. 박병호는 시즌 초반 꼴찌까지 내려앉은 팀에 보탬이 되지 못했고, 해법을 모색하던 감독은 박병호보다 나은 자원을 찾았다. 감독은 그런 상황에서도 베테랑을 최대한 예우하려고 했지만 팀 성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당연한 프로의 섭리이자 수많은 스타플레이어 출신 베테랑들이 그 동안 겪어왔던 프로세스다. 기량이 저하되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마련이고, 현실을 납득하지 못하면 노력을 통해 건재함을 과시하면 된다.
지난해 가을야구로 시간을 되돌려보자. 이강철 감독은 박병호의 극심한 타격 슬럼프로 마음고생을 가장 많이 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령탑의 선수 기용을 향한 온갖 비난에도 박병호를 향한 굳건한 신뢰를 드러내며 그를 줄곧 4번타자로 기용한 이가 바로 이강철 감독이었다. 각종 비난에도 “우리팀 4번타자는 박병호다”라는 인터뷰를 반복하며 비난의 화살을 홀로 맞았다. 박병호는 그런 사령탑을 향해 출전 시간이 적어졌다며 방출을 요청했다.
박병호 사태를 접한 사령탑은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28일 잠실에서 만난 이 감독은 “기사에 나온 그대로다. 본인이 방출을 요구했고 그 이외 진행 상황은 듣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듣는 것도 싫다”라며 “(베테랑을 향한) 배려로 이 팀을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결국 그 배려로 이렇게 됐다. 참는 사람에게는 이기는 사람이 없다. 잘 참는 사람이 언젠가는 이긴다”라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KT 나도현 단장 또한 OSEN과의 전화통화에서 “토요일 방출 요청 이후 박병호를 향해 함께 가자는 의견을 잘 전달했는데 월요일 오전까지 선수 의지가 완강했다. 그래서 웨이버 공시를 고민해봤지만, 박병호 같은 레전드급 선수한테 방출은 아닌 거 같아서 몇몇 구단에 연락을 돌렸다. 그런데 삼성에서 28일 오후 관심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트레이드로 선수를 보내게 됐다”라고 그간의 어려움을 전했다.
결국 박병호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뤘다. 프런트에 요청한 웨이버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오재일과의 1대1 트레이드를 통해 KT 유니폼을 벗는 데 성공했다. KT는 28일 잠실 두산전을 마친 뒤 “삼성에 내야수 박병호를 보내고, 베테랑 내야수 오재일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좌타 거포가 필요한 팀의 상황을 고려해 이번 트레이드를 추진했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스승은 배신감이 들 법도 했지만, 방출을 요청한 제자를 끝까지 감쌌다. 28일 경기 후 만난 이 감독은 “(박)병호도 가서 기회 많이 받아서 잘했으면 좋겠고, 오재일은 활용가치를 보고 문상철과 어떻게 쓸지 생각해보겠다”라며 “모쪼록 좋은 트레이드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박병호의 성공적인 대구 생활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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