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감독 잔혹사가 재현됐다. 2군 퓨처스 감독, 1군 감독대행을 거쳐 감독 자리에 오른 최원호(51) 감독이 부임 1년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한화는 27일 최원호 감독과 박찬혁 대표이사의 동반 사퇴를 발표했다. 최원호 감독은 팀이 극심한 부진에 빠진 4월말부터 몇 차례 자진 사퇴 의사를 보였지만 구단이 이를 만류하며 힘을 실어줬다. 최근 6경기에서 5승을 거두며 8위로 뛰어오르는 등 반등하는 타이밍에 갑자기 감독 교체가 이뤄졌다. 당분간 정경배 수석코치가 대행으로 팀을 이끄는 한화는 새 감독 선임을 위한 작업을 조속히 진행할 예정이다.
한화가 급격히 하락세를 보이던 4월말부터 성적 부진으로 감독 경질 여론이 악화됐고, 5월에도 고전을 거듭하자 교체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 최근 6경기에서 5승을 거뒀지만 대세를 바꿀 순 없었다. 현장과 함께 책임을 지기 위해 프런트의 수장 박찬혁 대표이사도 동반 사퇴하기로 했다.
지난해 5월11일 시즌 중 퓨처스에서 1군 사령탑으로 승격된 최 감독은 부임 1년이 갓 지난 시점에서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다. 1군 사령탑을 맡은 기간은 1년밖에 되지 않은 최 감독이지만 2020년부터 퓨처스 감독, 1군 감독대행을 거치며 5년간 한화에 몸담았다. 구단에서 공들여 키운 지도자였다.
선수 시절 현대, LG에서 투수로 활약한 최 감독은 한화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선수 은퇴 후 LG에서 2년간 코치를 지내다 나온 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피칭 연구소를 설립하고, 운동역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공부하는 야구인’으로 주목받았다. 해설위원 때도 이론에 입각한 박학다식한 해설로 팬들의 호평을 받았고, KBO 기술위원과 국가대표 코치를 지내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2019년 11월 당시 정민철 한화 단장이 부임 후 첫 외부 인사로 최 감독을 퓨처스 사령탑으로 영입했다. 장기적인 육성 시스템 확립을 위해 한화에 온 최 감독은 그해 6월 14연패에 빠진 한화가 한용덕 감독과 결별하면서 1군 감독대행으로 승격됐다. 전력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팀을 수습하느라 애를 썼다. 그해 감독대행으로는 역대 최다 114경기를 이끌면서 39승72패3무(승률 .351)를 기록했지만 10위 최하위 추락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최 감독은 대행으로서 합리적인 운영으로 호평을 받았다. 투수 강재민, 윤대경, 외야수 최인호, 임종찬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쓰며 가능성을 봤다. 김민우, 장시환 등 당시 핵심 선발들을 무리시키지 않고 시즌을 조기 종료시켜 후임자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이 선임된 뒤 다시 퓨처스 사령탑으로 돌아가 후방에서 지원했다. 2년간 수베로 감독과 협업으로 리빌딩 작업을 함께하며 구단과 방향을 같이 했다. 투수 윤산흠, 내야수 김인환 등 알려지지 않은 무명 선수들을 발굴해 1군 전력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2022년 퓨처스리그에선 역대 최다 타이 14연승을 달리며 북부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시즌 뒤 퓨처스 사령탑이지만 한화는 이례적으로 최 감독에게 3년 장기 계약을 안겼다. 그만큼 최 감독에 대한 내부 평가가 높았고, 머지않아 한화 차기 사령탑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수베로 감독의 후임이 될 것이 유력했는데 그 시기가 예상보다 조금 더 빨랐다. 지난해 5월11일 대전 삼성전을 마친 뒤 한화는 2023년까지 계약 기간이 남은 수베로 감독을 경질하며 최 감독을 1군 사령탑으로 승격했다. 구단에서 4년간 공들여 키운 지도자였고, 팀에 대한 파악이 잘 돼 있는 만큼 시즌 도중 교체라는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카드였다.
그러나 최 감독에겐 시작부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리빌딩을 위해 3년 계약한 수베로 전 감독은 팀이 6경기 5승1패로 반등하던 시점에 갑자기 경질됐다. 리빌딩을 위해 데려온 감독을 성적 부진으로 쫓아내면서 이기는 야구를 선언했고,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아다. 최 감독은 시작부터 어떻게든 성적을 내야 하는 부담스런 입장이 됐다. 6월 중순부터 18년 만에 8연승을 질주하면서 5강에 대한 희망도 지폈지만 결국 최종 순위 9위로 마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최 감독 체제에서 한화는 47승61패5무(승률 .435)로 수베로 감독(11승19패1무 승률 .367) 교체 전보다 승률이 높았고, 올 시즌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삼았다. 오프시즌에 FA 강타자 안치홍을 영입한 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 류현진이 12년 만에 전격 복귀하며 5강 후보로 기대감이 치솟았다. 구단 차원에서 시즌 전 출정식에서 리빌딩 종료를 선언하며 이기는 야구로의 전환을 알렸다.
최 감독으로선 어떻게든 성적을 내야 할 시즌이 됐다. 어느 감독이든 성적에 대한 부담이 없을 수 없겠지만 한화를 두고 구단 안팎에서 ‘5강은 기본’이라는 인식이 깔렸다. 시즌 전 최 감독도 농담처럼 “5강 못 가면 잘린다”고 말했는데 결국 개막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현실이 되고 말았다.
개막 10경기에서 7연승 포함 8승2패로 구단 역대 최고의 스타트를 끊었지만 지난달 5일 고척 키움전부터 5연패에 빠지며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불펜에 이어 선발진 붕괴와 타선 침체로 투타 엇박자가 났고, 부상자까지 속출하며 팀이 크게 휘청였다. 시즌 전 구상과 달리 투수 보직이나 야수 포지션 이동이 잦았다.
잡을 수 있는 경기들을 아깝게 놓치면서 최 감독에 대한 팬심이 들끓었다. 홈구장에서도 최 감독 경질을 외치는 일부 팬들의 목소리들이 나올 정도로 악화됐다. 최 감독이 이쯤부터 사퇴 의사를 내비쳤지만 시즌 초반이고, 구단에선 최 감독에게 힘을 실어줬다. 팀 상황이 좋지 않긴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시즌 중 감독 교체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최 감독은 팀이 시즌 첫 10위로 떨어진 23일 대전 LG전을 마친 뒤 사퇴 의사를 다시 밝혔고, 3일 뒤 최종 수락됐다.
최근 6경기에서 5승을 거두며 반등하는 분위기이지만 결국 감독 교체가 최종 결정됐다. 지난해 수베로 감독도 경질 전까지 6경기 5승1패로 상승세를 타던 중 감독 교체가 이뤄졌는데 올해도 한화는 비슷한 흐름 속에 또 감독 교체가 이뤄졌다. 올해 최 감독의 성적은 51경기 21승29패1무(승률 .420)로 8위. 지난해 정식 부임 후 올해까지 164경기에서 68승90패6무(승률 .430)를 기록했다. 2020년 감독대행 시절을 포함하면 총 278경기에서 107승162패9무(승률 .398)의 성적을 남기고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