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가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 새 파동을 일으킨다. 최근 SUV 기반의 픽업 트럭 출시를 공식화하고 이름도 ‘더 기아 타스만(The Kia Tasman, 이하 타스만)’으로 확정 발표했다. 시장이 뜨겁게 반응했다. 자동차 정보를 다루는 각종 커뮤니티는 타스만에 대한 기대로 술렁거렸다.
현대차그룹에서 픽업트럭을 생산하는 건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다. 현대자동차에서는 이미 북미 전용 픽업 ‘싼타크루즈’를 생산, 판매하고 있다. 자동차 커뮤니티에서는 싼타크루즈의 국내 판매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반복적으로 내고 있었다.
이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그룹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시장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내 때가 됐는 지, 카운트다운을 하듯 지난 4월 11일 ‘타스만’을 공식화했다. 출시 일자도 멀찍이 2025년으로 잡았다. 국내외 자동차 시장과 글로벌 경제 상황을 모두 고려한 시기 설정이다.
공개된 이미지도 묵직하다. 차명인 ‘타스만(Tasman)’의 레터링을 담금질하는 모습이다. 말 그대로 뜨겁게 가열된 금속재료를 차가운 물 속에 집어넣고 있다. 이미지 속에서 ‘TASMAN’이라는 레터링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그런데, 기아가 배포한 자료에는 기아의 마케팅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유독 강조되고 있는 ‘호주’라는 지역이다.
우선 이름부터가 호주산이다. 타스만은 호주 최남단에 있는 ‘영감(inspiration)의 섬’ ‘타스마니아(Tasmania)’와 타스만 해협에서 따왔다.
주력 시장도 명시하고 있다. 다양한 야외 여가활동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국내, ‘Ute(유트)’라는 고유명사가 있을 정도로 픽업에 대한 관심이 높은 호주, 사막과 같은 다양한 오프로드 환경이 있는 아중동을 딱 집었다. 호주와 아중동 시장이 핵심 공략 지점임을 숨기지 않았다. 픽업트럭 시장이 잘 무르익은 지역들이다.
기아가 호주를 우대한 이유가 있었다. 호주는 우리나라 이상으로 ‘타스만’에 대한 기대감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호주는 연간 20만 대 이상 픽업트럭이 팔리는 세계 2위의 픽업트럭 시장이다.
호주의 자동차 관련 매체들은 이미 깊이 있게 타스만 예상도를 다루고 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플랫폼, 파워트레인, 성능, 경쟁 차종 등을 세세히 예측하고 있다. 위장막으로 가려진 시험주행차 포착 사진과 영상도 상당수 확보돼 온라인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
2022년 말부터 기아의 새로운 픽업트럭 출시 계획을 다루기 시작한 호주 자동차 전문매체 WhichCa(위치카)는 지난 해 중순 기아가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 ‘타스만’의 차명을 상표 출원한 이후부터는 아예 ‘타스만’이라는 이름으로 신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위치카의 추적 기사는 지난 3월 11일 소소한 결실을 맺는다. 호주에서 타스만의 이름을 인정하는 티저 영상이 나온 시점이다. 확신을 얻은 위치카는 “추측과 소문의 긴 여정이었지만 기아의 픽업 진출이 마침내 공식화되었고, 뜨거운 기대를 모으고 있는 타스만이 글로벌 데뷔를 앞두고 있다”며 흥분한 목소리로 전했다.
호주의 또 다른 자동차 전문 매체 카스가이드(Carsguide)는 한 발 더 나간 보도를 냈다.
지난 4월 11일 “‘Ute’(유트, 픽업트럭)의 인기로 인해 타스만은 향후 몇 년 동안 기아를 호주 판매량에서 3위 또는 2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타스만의 출시 사실을 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소비자들의 기대치를 반영해 판매 추이까지 긍정적으로 예상했다.
호주의 언론들이 예상하는 타스만의 스펙은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파워트레인은 순수 전기와 내연기관을 병행하며, 구동방식은 오프로드에 중점을 둔 사륜구동 스포츠유틸리티이다. 내연기관은 4기통 2.2 터보 디젤 또는 2.5 가솔린 터보를 장착할 것으로 예상되며 시트는 듀얼 캡이 유력하다. 1톤 이상의 적재물을 실을 수 있고, 3.5톤의 견인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포드 레인저 랩터를 벤치마킹 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실제로 타스만은 지난 2월 포드 레인저 랩터와 나란히 스웨덴의 한랭지역에서 눈길 테스트를 받고 있는 장면이 사진으로 포착되기도 했다.
기아가 호주와 아중동 시장을 주요 공략지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결정이다. 시장성은 신차 출시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다. 그런데, 기아는 타깃 시장에 조심스럽게 한국을 넣었다. 한국의 자동차 시장이 픽업트럭을 소화할 정도로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음이다.
기아는 4월 11일 타스만 출시를 공식화하면서 ‘브랜드 최초의 픽업트럭’이라고 했지만 이 규정이 성립하려면 몇 가지 단서가 필요하다. 기아산업이 아닌 ‘기아’이어야 하고, 세단 기반의 픽업이 아닌 SUV 기반의 픽업이어야 한다.
기아는 ‘기아산업’ 시절이던 1973년 ‘브리사 픽업’을 출시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기아는 1944년 경성정공으로 시작해 1952년 기아산업, 1990년 기아자동차, 2021년 기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산업성장과 궤를 같이 했다. 기아는 국내 최초로 자전거를 제작한 것은 물론 삼륜차와 트럭 등 다양한 이동 수단을 만들어왔다.
기아의 픽업 차량 역사는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주인공 송강호가 운전했던 ‘브리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아산업은 1973년 8월 카타르에 소형 트럭 ‘브리사 픽업’ 10대를 수출했다. ‘브리사 픽업’은 세단인 브리사를 적재량 500kg인 픽업 형태로 만든 차량이다.
1974년 공식 출시된 승용차 브리사는 처음에는 마쓰다 플랫폼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부품 국산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 끝에 1976년에 약 90%의 국산화율을 달성한 모델이다. 브리사는 과거 석유 파동 당시 우수한 경제성을 토대로 많은 인기도 얻었다.
올해 창립 80주년을 맞는 기아의 긴 역사 안에서 보면 ‘타스만’은 두 번째 픽업이 된다. 하지만 요즘 자동차 시장에서 지칭하는 ‘픽업트럭’은 타스만이 효시다. 더구나 브리사 픽업은 마쓰다 기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아 독자 기술로 자체 개발한 첫 번째 픽업은 타스만이 분명하다.
기아가 2025년에 픽업트럭을 선보이는 것은 또 하나의 혁신으로 꼽을 만하다. 돌이켜보면 80년의 기아 헤리티지도 도전과 혁신으로 쌓아올린 탑이다. 최근 EV9이 그랬던 것처럼 기아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요즘의 시장에서 정의하는 ‘픽업 트럭’은 주로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에 화물차의 기능을 접목시킨 차종이다. 하지만 장고 끝에 픽업 트럭을 출시하는 기아가 개발시대에나 어울리는 ‘화물차’에 초점을 맞췄을 리는 없다. 기아는 타스만의 공식화 단계에서 ‘목적’을 분명히 했다. “새로운 도전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다재다능한 ‘라이프스타일’에 어울리는 차”라고 했다.
운송의 기본 목적에서 벗어나, 문화와 스타일을 존중하는 '매력있는 차’로 틈새 시장을 적극 공략한다고 했다. 자연 속에서 여가를 즐기려는 소비층을 노린, 개성과 성능을 모두 갖춘 프리미엄급 유틸리티가 될 공산이 크다.
“왜 하필 지금?”이라는 질문에 “딱 이맘 때”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