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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프로(김지훈 분)가 탄 3억대 람보르기니가 배려심은 1도 없이 좁디좁은 길에서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쌩~하고 달려 나간다.
동네 할머니는 햇살 좋은 가을볕에 잘 말리던 돗자리 위 고추가 망가지자 그를 향해 “또 저 지X을 하고 있네? 아이고. 고추가 아주 지X이 났네, 지X이 났어”라고 화를 낸다.
이충현 감독의 신작 ‘발레리나’는 곳곳에 숨겨진 메타포가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이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동음이의어를 통한 비웃음으로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물의를 빚은 사건들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현실을 빗대어 폭로하고 풍자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야기로 나아가기 위해 최 프로와 약사(박형수 분), 민희와 여고생(신세휘 분) 등의 캐릭터 대비를 통해 현실을 강조할 곳을 찾았다. 곳곳에 메타포를 숨겨놓은 것이다.
특히 “거기가 여자 애들이 더 잘 주잖아”라는 최 프로의 말을 통해 승리·정준영 등 불법촬영물 제작 및 유포 사건과 ‘N번방’, ‘박사방’ 등 성착취 유포사건이 떠오르는 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터.
영화를 보다 보면 2015년 12월 승리와 정준영, 유씨 등이 속해 있던 단톡방에서 ‘여자는 잘 주는 애들로’라는 단톡방 속 이들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뿐만 아니라 갈수록 성범죄가 진화하고 있으니 디지털 강국이라는 명성이 부끄러울 뿐이다.
대법원까지 간 결과 승리는 1년 6개월 실형을 받았고 올 2월 9일 출소했다. 정준영은 대법원에서 원심 판결 확정으로 징역 5년형을 최종 선고 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우리 사회가 여성 및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가해자인 최 프로는 마지막에 가서 “내가 죽을 만큼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 아니잖아”라고 결국 검은 속내를 드러낸다.
‘발레리나’(감독 이충현, 제작 클라이맥스 스튜디오)는 경호원 출신 옥주(전종서 분)가 소중한 친구 민희(박유림 분)를 죽음으로 몰아간 최 프로를 쫓으며 펼치는 아름답고 무자비한 감성 액션 복수극을 표방한다.
‘발레리나’는 디지털 성범죄, 특히 성착취 영상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사회적·시대적 흐름을 무겁게 인식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옥주는 일명 ‘물뽕’ 및 불법촬영 범죄 피해자로서 사망한 친구 민희를 대신해 최 프로에게 복수를 하는 인물.
현실에서는 피의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전직 경호원인 옥주가 그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면서 일련의 실제 사건들이 보여 온 해묵은 증오를 분노로 폭발시킨다. 피해자들은 물론 지하철이나 공중화장실에 혹시나 숨어있을지도 모를 몰카가 두려운 여성들이 옥주의 목숨 건 복수 끝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건, 그녀가 그들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며 옥주 자신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여성 혼자서 여러 명의 남성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든데, 옥주 역의 배우 전종서가 발레복을 연상케 하는 크롭 톱을 입고 토슈즈를 신듯 운동화 끈을 질끈 묶는다. 그러고나서 ‘자비심과 용서는 없다’는 표정으로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함을 발산했다.
오프닝부터 화려한 그녀의 액션 연기는 전종서의 또 다른 모습과 함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단순한 스토리 안에 갇히기보다, 혼자 당당하게 액션신을 구축해냈다는 점에서 액션 배우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옥주와 민희가 집 현관 비밀번호도 공유할 만큼 절친한 사이인데 전종서와 박유림은 시나리오상 절친을 연기했다.
연기를 못했다는 게 아니라 화면을 장악할 정도의 ‘찐친’ 케미스트리가 느껴지지 않아 아쉽다. 전종서는 오히려 빌런 최 프로 역의 배우 김지훈과 연기할 때 한층 더 친밀하게 보인다. 그와 함께 전작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2022)을 한 덕분일 게다.
악인으로 변한 김지훈의 변신이 돋보이며, 특별출연한 배우들이 곳곳에서 호연으로 웃음을 안긴다. 러닝타임 93분.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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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