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베네수엘라에 칼라보조라는 곳이 있다. 인구 10만 남짓의 작은 도시다. 그곳에서 15살짜리 소년 하나가 버스를 기다린다. 마라카이라는 도시로 가기 위해서다. 거기서 트라이 아웃이 열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200㎞나 되는 거리다.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다. 4시간 정도 걸렸다. 어렵게 찾아갔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쟁쟁한 경쟁자들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이다. 누군가 한마디를 건넨다. “이봐, 한 달 뒤에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조금 더 준비해서 와.”
막연한 얘기다. 기껏 한 달이다. 그래봐야 뭐가 달라지겠나. 집에 돌아가 가족들 볼 면목이 없다. 특히 어머니는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잘 안됐어요. 스피드가 78마일(125㎞)밖에 안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어머니가 솔깃한 눈치다. 한 달 뒤라는 말 때문이다. “진짜 다시 보자고 했다는 말이지?” 그날부터 빡센 캠프가 시작됐다. 새벽 5시가 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빨리 일어나.” 어머니는 혹독한 조교 모드다. 무서운 얼굴로 쉴 새 없이 몰아붙인다. 달리기, 무게 들기, 또 달리기, 피칭…. 녹초가 될 때까지 구르고, 또 굴렀다.
약속한 시간이 됐다. 다시 마라카이로 떠난다. 두번째 오디션이다. 이번에는 85마일(137㎞)을 찍었다. 단 2타자만 상대했는데, 그걸로 OK가 떨어졌다. “9월이면 16살이 된다고?” 계약이 가능해지는 나이다.
영어로 된 명함을 건넨다. 호세 리온이라는 이름이다. 미네소타 트윈스의 베네수엘라 담당 스카우트다. 계약금으로 15만 달러(약 2억 원)가 책정됐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다. 사인하면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 도미니칸 리그에서 수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손을 꼭 잡는다. “넌 나처럼 노점상이나 하면서 살면 안 된다. 꼭 야구 선수로 성공하거라.” 그렇게 헤어졌다. 브루스더 그라테롤(현재 25세)은 그때부터 혼자 지냈다. 도미니카와 미국의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험하고 고달픈 마이너리그 생활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제(한국시간 20일) 다저 스타디움이다. 타이거스와 일전이 펼쳐진다. 8회 홈팀의 세번째 투수 그라테롤이 마운드에 오른다. 중계 카메라는 관중석 스위트룸의 누군가를 클로즈업한다. 베네수엘라에서 헤어졌던 어머니(이스말리아 그라테롤)다.
3타자를 처리해 이닝을 마쳤다. 아들은 덕아웃으로 가며 손을 번쩍 들어 어머니 쪽을 가리킨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글러브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그는 이미 인정받는 메이저리거다. 명문 다저스의 셋업맨으로 활약하고 있다. 올 시즌 64경기에서 4승 2패 7세이브, ERA 1.28을 기록 중이다.
15살 때 85마일이던 스피드는 이제 100마일을 쉽게 넘긴다. 날 좋을 때는 103마일도 찍는다. 그것도 똑바로 오는 공이 아니다. 예리하게 떨어지는 싱커성 구질이다. 다저스 불펜의 가장 촉망받는 인물이다.
아들은 늘 어머니를 걱정했다. 고향의 불안정한 생활과 치안에 가슴을 졸였다.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모셔 오는 일이 점점 난감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끝에 2주 전 중요한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아마도 비자나 영주권 관련인 듯).
급기야 이틀 전 LA 공항에서 재회가 이뤄졌다. 마지막으로 본 게 7년 전이다. “처음 만난 순간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우리 아들이 이렇게 크고, 예쁘게 자랐구나.’ 260파운드(120㎏)가 넘는 25살짜리에게 말이죠. 끌어안으니 어머니에게서 고향집 냄새가 났어요.”
아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내가 14~15살 때 이리저리 흔들렸죠. 주변 친구들은 마약이나 갱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흔했어요. 그럴 때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어머니가 지켜준 덕분이죠(어머니는 소프트볼 선수 출신이다).”
그의 말이 끊이지 않는 밤이다. “베네수엘라를 떠나서도 힘든 일이 많았어요. 데뷔할 때도, 결혼할 때도, 딸을 낳았을 때도. 어머니가 옆에 없었죠.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던지는 모습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오늘 그 간절한 소망이 이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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