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및 예고편에 이미 ‘치악산’이라는 제목으로 공식 홍보를 시작했기에 제목 변경은 불가하다고 지난 주말까지 입장을 고수해 온 영화 ‘치악산’ 측이 이번 주중으로 들어서도 거센 항의에 시달리자, 강원도 원주시 측과 구룡사 측과의 원만한 관계 회복을 위해 한발 뒤로 물러났다.
상업영화를 만드는 예술가로서 자기결정권을 침해받아 못마땅하겠으나, 상생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제목 변경이 가능하다”고 밝힌 것이다. 하지만 ‘치악산’ 측의 논란 대처 과정은 도통 일관성이 없었다.
물론 지자체로부터 예상도 못했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받게 된 ‘치악산’ 측의 애통한 마음과 당황스러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극적인 소재에서 자신들이 가진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벌였는데 실존하는 명산과 국립공원 측이 반발하고 나설 것이라는 예상은 추호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과감하게 제목 변경을 수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협상이 완전히 완료되기 전 논의 사항과 양측의 입장을 보도자료로 배포하면서 서로 오해가 커지게 됐다.
이에 오성일 PD는 31일 오후 서울 자양동 건대입구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치악산’의 언론시사회 및 기자회견에서 “원주시에 공문을 통해 제목 변경은 가능하다고 얘기 해놨다. 빠른 피드백을 주면 좋은데 아직까지 얘기가 없다”고 밝혔다.
지난 23일~24일 양일간 원주시 측과 협의를 할 때까지만 해도 ‘치악산’ 측은 제목 변경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24일 오후 한 관계자는 본지에 공식 포스터가 완성돼 배포됐고 개봉이 3주 가량 남은 시점이기 때문에 제목 변경은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던 바.
하지만 오 PD는 지난 30일 인터뷰를 통해 28일(월)이 돼서야 원주시 측에 제목 변경 의지를 전달했다고 직접 밝혔다.
이 같은 이유는 전날(27일) 원주시가 영화 ‘치악산’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은 물론이고 상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유무형의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청구소송 등 강력한 법적 조처를 할 계획이라고 전한 입장을 접한 뒤, 결국 제목 변경 입장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4일(목) ‘치악산’의 홍보사 측이 보낸 보도자료를 보면 “먼저 영화의 제목 변경과 본편 내에 등장하는 ‘치악산’을 언급하는 부분을 모두 삭제해달라는 요청에 관해, 그렇게 된다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촬영해야 할 정도로 이야기의 연결이 맞지 않는다”며 “주요 출연 배우 중 한 명이 군 복무 중인 관계로 재촬영 역시 불가한 상황인 점 양해해 주십사 요청드렸습니다”라고 써놨다. 제목 변경은 물론 부분 삭제, 재촬영 등 세 가지 사항 모두 불가하는 의미다.
‘제목 변경은 없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어도 “제목 변경과 본편 내 등장하는 치약산 언급 부분, 재촬영 역시 불가한 상황인 점 양해해 주십사 요청을 드렸다”는 완곡한 표현을 통해 제목 변경과 부분 삭제, 재촬영이 모두 어렵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원주시 측은 ‘치악산’ 측의 이 같은 행보에 협상하는 도중 보도자료를 보냈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사안이 협상에 이르기 전 공론화를 시켰다는 점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입장이다.
그래놓고 오 PD는 31일 “24일에 협의를 하고 그 이후(24일 밤)에 공식 입장을 냈는데 그걸 바탕으로 쓴 기사들이 우리가 제목을 못 바꾼다는 식으로 헤드라인에 썼다. 나도 기사 검색을 해봤는데 ‘제목 변경 없음’ 등의 형태로 나간 것들이 있다. 원주시에서 그 부분 때문에 오해를 하게 된 거 같다”며 “내가 제작사 입장문을 다시 봤는데 무조건 제목 변경이 안 된다고 한 적 없다.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입장문 안에 ‘제목 변경 못한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은 것뿐이지 “영화 제목 변경, 본편 내에 등장하는 ‘치악산’ 언급 부분 모두 삭제해달라는 요청, 배우 중 한 명이 군 복무 중인 관계로 재촬영 역시 불가하다”고 완곡하게 전달한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기사로 인해 원주시와 협의가 안 된 것처럼 책임 회피를 하고 나섰다.
‘치악산’ 측이 제목을 변경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24일 밤에서 25일 오전 사이가 아닌, 원주시 측의 법적 조치 계획이 전해졌던 27일 하루 후인 28일이다. 그들은 애당초 제목 변경 의사도 있었다고 말을 바꾸었고 애먼 기사 탓을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 PD는 “제목 변경은 원주시에 ‘바꿀 수 있다’고 내용을 보내놨다. 하지만 ‘치악산’ 대사를 빼거나 묵음으로 처리하는 건 그 부분은 무리가 있다”면서 본편 중 대사 삭제 및 묵음 처리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고수했다.
이는 영화 전체의 만듦새 측면에서도 당연한 선택이다. 더욱이 출연자 중 한 명이 군 복무 중이어서 재촬영이 어려울 뿐더러, 일부 배우들의 촬영이 가능하더라도 서로 스케줄을 맞추기 어렵고, 재촬영에 동의하지 않는 배우들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치악산’을 연출한 김선웅 감독이 “허구에서 시작한 이야기다. 유튜브에서 수백만 건을 기록한 이야기에서 시작했다”며 “공포 콘텐츠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라는 마음”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영화로 인해 치악산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갖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충분히 느껴진다. 백 번 양보해 제목 변경을 결정했다는 건 더 이상 문제를 키우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실제 지명을 제목으로 사용했던 ‘곡성’(2016)과 ‘곤지암’(2018)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영화 상영으로 인해 치악산에 부정적 이미지가 생성되고 관광객이 끊길 수 있다는 건 지자체의 지나친 기우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모든 이슈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면 과정이 있다. 이번 ‘치악산’ 논란은 협상 내용을 중도 배포한 절차와 그 이후 대처 과정도 허술했다. 홍보사 측의 보고를 받은 제작진의 대처 또한 적절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 purplish@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