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호프를 찾아서 (1)-22연승 신화의 원년 최고 스타 박철순 해설위원
2027년이면 한국야구 명예의 전당이 들어설 야구박물관이 탄생할 전망이다. 그동안 말이 많았던 야구박물관이 부산 기장군에 올 6월 착공 예정으로 2027년 개관할 전망이다. 박물관에 들어갈 소장품은 그동안 수집이 많이 돼 상태이고 그곳에 한 자리를 차지할 명예의 전당도 이제부터 준비해야 한다. 오센(OSEN)은 특별기획으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주인공이 될 레전드 스타들을 찾아 인터뷰한다. 또한 한국야구 미래를 책임질 기대주(Hope)를 찾아갈 예정으로 일명‘KBO 호프를 찾아서’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박철순(69) 선수는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로, 1982년 원년 시즌에서 22연승을 기록하며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선수 생활 동안 여러 차례 부상을 겪으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야구 인생 역정을 들어보았습니다.(3편.끝)

-고교까지는 별 볼 일 없던 내가 스리랑카 영웅도 됐고, 카퍼레이드까지 해봤다....
=박 감독님 이력 중에 좀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은 부산에서 중학교까지 야구를 했는데 갑자기 서울 배명고로 올라왔습니다. 야구를 잘해서 스카우트 된 건가요.
▲전혀 아닙니다. 원래는 부모님이 서울 분들인데 6.25때 부산으로 피란을 가게 돼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부산에서 야구를 하게 된거죠. 하지만 경남중학교를 4년 다녔는데도 키가 작아서 경남고 진학을 못하고 부산고에 들어갔다가 얼마 안돼 바로 나왔고 대전 대성고로 전학했습니다. 그런데 대성고 야구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서울 배명고로 유학을 온 셈이죠. 감독님 집에서 하숙을 하는 등 엄마가 뒷바라지 하느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배명고에서도 2학년 때까지는 키도 작고 야구는 열심히 하는데 평범했던 선수였죠.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성장판이 열린 것인지 갑자기 키가 커지면서 평균 이상의 야구 선수 체격(키 182cm, 체중 70kg대)가 됐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팀전력이 좋지 않아 전국대회도 제대로 못나가고 전국고교가 모두 참가하는 봉황대기에 나가서도 1회전에 콜드게임패로 탈락했죠.
=그런데 어떻게 연세대를 진학하게 됐나요.
▲당시 연세대 배수찬 감독님이 저를 좋게 보셨나봐요. 8월 봉황대기에서 일찌감치 탈락하고 난 다음 날 배 감독님이 학교로 찾아와서는 당장 연세대로 오라고 하는 거였어요. 나는 남은 방학이나 푹 쉬며 보내야지 했는데 곧바로 연세대 야구부 합숙소로 가게 된거죠. 연대 야구부는 연고전을 앞두고 합숙중이었는데 오후까지는 배명고에 있다가 학과가 끝나면 연세대로 가는 일정을 보내며 연대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고교 성적도 별볼 일 없었는데 감독님이 처음에는 투수보다는 타자로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본 것 같아요. 내가 배명고 4번 타자이자 에이스였거든요. 연대에서는 투수로서 볼은 빠른데 두각을 못내고 공군(당시 성무 야구단)에 입대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복학해서는 한미대학야구전에 나가게 됐고 그것이 미국 진출까지 이어지게 된거죠.

=연대에서는 후배 최동원 선수‘빠따 사건’등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는데....
▲그 얘기는 안하고 싶네요. 돌아가신 분을 언급하는게....후배인 최동원은 당시 최고의 투수였고 동향인 부산 출신이라 저를 잘 따랐고 좋아했습니다. 빠따는 당시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내가 동원이 아버님하고 안좋은 일이 있어서 그게 언론에 보도된 거죠. 그때나 지금이나 내생각에 동원이는 차원이 다른 역대 최고의 투수입니다.
=감독님에게 또 하나 따라다니는 곤혹스러운 일이 있잖아요. 1994년 윤동균 감독에 대한 선수단 항명 사태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 해 팀성적이 부진한데다 군산경기에서 패한 뒤 감독님이 선수단을 집합시키며 야구하기 싫은 선수들은 당장 보따리 싸서 서울로 올라가라고 화를 내셨죠. 여기에 저를 비롯한 고참 선수들이 동조하면서 항명 사태가 돼 버린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님과 선수들간 소통이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었죠. 중간에서 코치들이 제대로 조율해주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기도 하고요. 그 바람에 감독님이 연임을 못하게 됐고 나도 책임을 지고 옷을 벗겠다고 했는데 못한 거죠. 요즘도 감독님이 같이 소주 한 잔 할 때면 그 때 넌 옷벗지 않기를 잘했다고 하는데 죄송하죠.
=은퇴 후에는 코치, 사업가 등을 거치다가 스리랑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셨습니다.
▲스리랑카 감독은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던 순간입니다. 대한야구협회 추천으로 2015년 스리랑카 감독으로 가게 됐는데 선수들이 덩치는 좋은데 야구 기본기가 엉망이었습니다. 대부분 크리켓 선수 출신인데다 군인들이었죠. 날씨가 뜨거운 지역이다 보니 오전 일찍 훈련한 뒤 오후 4시에 다시 재개하는데 군인들이라 총들을 들고 옵니다. 투수들은 크리켓처럼 언더핸드로 던지는 것에 익숙해 있는 탓에 정통파로는 도저히 교정할 수가 없어서 사이드암으로 가르쳤는데 수준급으로 올라왔습니다. 덕분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동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땄죠. 나는 대회가 끝나고 바로 귀국하는 스케줄이었는데 군대 장군이었던 스리랑카 단장이 스리랑카가서 환영대회에 참석해야한다는 바람에 귀국을 늦추게 됐죠. 스리랑카 도착하니 카퍼레이드까지 하며 성대하게 환영식을 하더라고요. 생소한 야구라서 그렇지 크리켓이었으면 더 난리가 났을 거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내 인생에서 감독도 해보고 좋은 추억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코치, 해설위원, 대표이사 등으로 불리는 것보다 감독님으로 불러주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감독은 야구인이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은 자리이니까요.

=아직도 ‘불사조’ 박철순을 잊지 못하는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몇년전 두산 구단 주최로 열렸던 팬미팅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대부분 50대, 60대, 70대의 팬분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30,40대도 있어 놀라웠습니다. 한 팬은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 야구장 왔다가 나하고 같이 찍은 사진이라며 보여주는데 정말 가슴이 찡하더군요. 아직도 팬들이 잊지 않고 저를 찾아주신게 너무 고마울 따름입니다. 또 선수시절 내내 뒤에서 도움을 준 김태룡 두산 베어스 단장님 등 두산 프런트 여러분들께도 고맙습니다. 더불어 배명고 시절 야구를 참 예쁘게 했던 1년 후배로 지금까지 함께 해주고 있는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에게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박선양 기자 sun@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