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객석은 어린 천재에 환호했다. 하지만 9살 아이는 지쳐 있었다. 게스트로 나선 소년의 이력을 읊어야 되는 순간 아이는 멈췄다. 녹화도 멈췄다. 잠시의 휴게시간. 아이가 사라졌다.
소년이 찾아냈을 때 아이는 손가락을 짓씹고 있었다. 피가 나도록. 소년은 두통과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아이의 고통이 절절히 느껴져서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건조했다. “이거 하면 우리 가족 고기 먹어. 나쁘지 않아.”
소년은 부모 손에 이끌려 스튜디오로 향하는 아이를 지켜봤다. 고통스럽게. 아이는 “아까 힘들어서 그랬지?” 다정하게 물어줬던 오빠를 자꾸만 돌아봤다.
29일 첫 방송된 tvN 월화드라마 ‘이로운 사기’(한우주 극본, 이수현 연출)는 ‘공감 결핍’의 사기꾼 이로움(천우희 분)과 ‘과잉 공감’의 변호사 한무영(김동욱 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함께 할 수 없는 두 캐릭터를 한 프레임에 넣겠다는 제작진의 발상이 참신하다.
드라마는 한무영의 정신과 치료 전 에피소드로 캐릭터 설명을 시작했다. ‘별이 아빠’ 케이스. 사무직에서 현장직으로 일방적으로 내몰렸다 숨진 사례다. 한무영은 피고인 대기업의 행태에 격분, 변호사답지 않게 공격적으로 공박하다 두통과 현기증을 느끼기까지 한다.

이 에피소드는 ‘과잉 공감’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과잉공감은 확증편향을 불러오고 그에 따른 감정적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법정에서 한무영이 보여준, 변호사답지 않은 극단적인 공격성은 의뢰인인 ‘별이 엄마’와 피해자인 별이 아빠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비롯됐다.
과잉 공감은 극단적 원리주의자나 근본주의자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학계에선 사이코패스와 같은 ‘공감 결핍’만큼이나 ‘과잉 공감’도 사회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편 존속 살해범으로 소년범 최장기인 15년 형을 언도받은 이로움은 사이코패스다. 입소 날 부러뜨린 젓가락으로 교도관의 목을 주저없이 찔렀다. 남편의 눈에 독을 떨어트려 살해한 신참이 자신이 읽던 책을 찢자 똑같은 방식으로 협박, 공황장애를 일으키게 만들기도 했다. 수감 내내 위험인물 표시인 노란 명찰을 달고 있어야 했다.
공감 결핍은 타인의 삶에 무관심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무관심하다.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타인을 가차없이 희생시킬 수도 있다. 이로움의 경우 아이큐 180의 천재적 두뇌는 그 이질성을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이로움은 10년 째 복역 중, 진범 예충식(박완규 분)의 자수로 무죄를 받았다. 하지만 수감생활 중 범법에 대해서는 추가징역을 집행유예 받아 보호관찰관 고요한(윤박 분) 관할로 들어간다.

그런 이로움이 한무영을 국가배상청구소송 변호사로 선임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사만으로도 이로움에게 공감 충만된 한무영이 예충식의 국선변호인을 자임했다. 그리고는 반성의 기미 없이 ‘10년 운운’하는 예충식에게 법원이 중형을 언도하도록 예충식의 진술을 세상에 공개, 무기징역형을 끌어냈다. 이로움의 석방일엔 새 옷도 사다 안겼다.
의뢰인과 변호사로 만난 자리. 이로움은 한무영의 호의에 눈물짓는 등 한껏 처연함을 연기했다. 그리고 음료를 받아오던 한무영은 그 처연함과 무관하게 발을 까딱거리는 이로움을 목격한다.
담당 정신과 의사 모재인(박소진 분)은 경고했다. 공조성향이 높은 사람은,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같이 착한 사람들을 이용하는데 도가 튼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라고.
그런 모재인에게 한무영은 단언했다. “쉽게 잡아먹히지 않을 겁니다.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않을 거예요.” 변호사가 된 소년은 자신에게 진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9살 아이를 더 이상 고통 속에 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변호인으로서 이로움 케이스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곳곳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자수한 진범 예충식은 사채 빚에 시달리던 자다. 그런데 누군가 영치금을 한도까지 채워줬다. 적목재단이란 곳도 신경이 쓰인다. 이로움을 육성영재로 받아들였던 곳. 하지만 베일을 둘러친 듯 실체를 알기 힘들다. 드러난 유일한 인물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기호(박지일 분)뿐. 분명한 건 적목재단이 등장한 순간 이로움의 생활반응은 현실에서 사라졌었다는 점. 이로움은 부모 사후에야 방화흔을 잔뜩 뒤집어쓴 채 나타났었다.
예충식을 추궁했다. 당시 현장에 또 다른 공범은 없었는지. 예충식이 답했다. “더 있으면 뭐? 어차피 그 년이 죽일텐데.” 이로움은 누군가를 죽이려 한다. 그 당사자가 신기호일 수 있다.
한무영이 달려갔을 때 실제로 이로움은 신기호를 죽이려는 중이었다.
살해기도를 무위로 돌린채 무영이 물었다. “적목에서 무슨 일을 당했나?” 로움이 답했다. “나는 원래부터 이랬어. 적목이 날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뭘 했든 당신도 공범야. 피고로 서기 싫으면 맡은 일이나 잘해. 오지랖 떨지 말고.” 로움으로선 무영에게 더 이상 본색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마침내 국가배상 청구소송 법정. 변호인이 없어도 승소가 확실한 케이스다. 판사도, 국가측 대리인도, 그리고 이로움도 순탄한 판결을 예상했다. 하지만 원고측 대리인 한무영은 달랐다.
“재심에서는 원고가 방화를 강요당한 피해자였고 범행의 목격자였단 사실이 인정됐습니다. 그러나 인정된 사실이라고 해서 완전한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금성시 살인사건에 대한 범인의 항소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아직 규명될 진실이 있다면 거기서 밝혀질 것이라고 봅니다. 재심이 없었다면 손배소도 없습니다. 재심사건 속 진범의 항소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원고의 무죄가 유의미해질 때까지, 혹은 원고가 받았던 형량의 만기일까지 본 재판의 연기를 부탁드립니다.”
심리는 연기됐다. 아이큐 180의 천재 이로움도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망할 놈의 오지라퍼 변호사한테 뒤통수를 된통 맞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안방에서 ‘공감 결핍’의 검사를 만났었다. tvN 드라마 ‘비밀의 숲’의 황시목(조승우 분)이다. 또 역시 ‘과잉 공감’의 형사도 만났었다. SBS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송하영(김남길 분)이다.
특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송하영은 일반인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의 공감 부재 속 의식의 흐름을 자신만의 과잉 공감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이로움에게 한무영은 송하영처럼 제 삭막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천적이 될 모양이다. 또 한무영에게 이로움은 저만 공감하고 저는 공감받지 못하는 고통이 될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말미에 두 주인공이 ‘균형 공감’을 획득하길 기대한다면 너무 낙관적일까? 한무영과 이로움, 이로움과 한무영의 ‘내 편인 듯 내 편 아닌 내 편 같은’ 행보가 궁금해진다.
아쉬운 점도 있다. 변호사법 제26조(비밀유지의무 등)는 변호사 또는 변호사이었던 자는 그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형법 제317조(업무상비밀누설죄)는 변호사가 그 업무처리 중 지득한 타인의 비밀을 누설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등으로 처벌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한무영의 사례를 징계 회부 정도로 처리했다. 그렇게 처리해도 무탈할 정도의 사안인지 회의스럽다.
또 국내에서 운영되는 카지노는 모두 17개다. 그 중 강원랜드를 제외한 16개가 외국인 전용 카지노다. 서울 시내 한 복판의 카지노에서 천우희가 내국인 커플의 후원을 받아 블랙잭으로 돈을 따는 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현실성과 개연성에 대한 제작진의 세심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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